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빠른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다. 개봉 5일만에 누적 관객수를 100만명을 돌파하며 올해 개봉작 중 주말 최고 스코어를 달성했을 뿐 아니라, 동시기 경쟁작 ‘아바타: 불과 재’ 를 가볍게 제치며 ‘천만 영화’ 가능성까지 제기되고 있다.
영화는 노산군(단종)의 비극을 감정의 밀도로 밀어붙인다. 이미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박지훈이 그려낸 단종의 가슴 아린 얼굴 앞에서 관객은 끝내 다른 결말을 기대하게 된다. 하지만 역시 반전은 없었다. 필자 역시 단종의 쓸쓸한 마지막에 한동안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조금 더 오래 단종을 마음 속에 담아보고 싶은 마음에 그에 대한 실제 기록을 찾아보았다.
1. 실제 엄흥도와 노산(단종)의 관계

영화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궁금증은 엄흥도와 단종의 실제 관계였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두 사람은 영화만큼이나 각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단종이 악몽을 꾸고 울며 잠에서 깼을 때, 엄흥도가 밤중에도 곧바로 강을 건너와 단종을 살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본 단종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와서 묵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와서 위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 네가 찾아왔으니 그 정성이 기특하다. 이제서야 초야(草野)에도 선인(善人)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엄흥도는 거의 매일 밤 단종을 찾았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 엄흥도가 밤중에 자결하려는 단종을 막고, 악몽에 시달리는 그를 위해 약재를 캐러 다니는 장면들은 이 기록과 맞닿아 있다. 과장과 상상이 가미 되었을지언정, 관계의 본질은 허구가 아니었던 셈이다.
더 가슴 아픈 대목은 1457년 10월, 단종이 세상을 떠난 뒤다. 엄흥도는 관과 이불을 직접 마련해 염을 하고, 관을 등에 지고 선산으로 향해 자신의 손으로 단종을 묻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식은 주검이 된 단종을 묻는 엄흥도의 마음이 어땠을지, 차마 상상조차 되지 않아 마음이 더 저릿해진다.
2. 단종의 실제 죽음, 서로 다른 기록들

노산(단종)의 죽음은 역사서마다 다르게 기록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특히 『세조실록』에서는 단종의 죽음을 자결로 정리한다. 세조는 송현수(단종의 장인) 등을 처형한 뒤 “나머지는 논하지 말라”고 했지만, 곧이어 “단종이 스스로 목을 매어 졸(卒)하였다”고 기록한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최소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러나 다른 사서인 『연려실기술』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영월에 이르렀으나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렸고, 그 사이 단종을 늘 모시던 통인 하나가 스스로 나서 활줄과 노끈으로 단종을 죽게 했다는 기록이다. 영화 속 장면과 거의 흡사하다.
이 기록에는 단종의 죽음 이후 시녀와 시종들이 앞다투어 동강에 몸을 던졌다는 참혹한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며, 영화가 선택한 서사에 역사적 설득력을 더한다.
왕조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목적성이 짙은 『조선왕조실록』과 달리, 『연려실기술』은 구전과 비공식 기록까지 폭넓게 담아낸 사서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영화가 선택한 서사가 결코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3.한명회, 권력의 얼굴

한명회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 하나. 오늘날 압구정이라는 지명은 한명회가 한강 변에 지은 정자의 이름 (압구(狎鷗))에서 유래했다.
당시 그의 압구정은 풍광이 뛰어나 중국 사신들까지 즐겨 찾았다고 한다. 어느 날 사신을 위해 궁중에서 쓰는 차일(햇볕을 가리기 위한 천막 시설)을 빌려달라고 성종에게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왕에게 얼굴을 붉히며 분노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결국 귀양을 갔다.
이 일화만 보더라도, 당시 한명회가 누리던 권세와 스스로 인식하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명회의 외모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그의 신도비명에는 키가 크고 외모가 빼어났다는 표현이 등장하며, 『연려실기술』에는 “기개가 범상치 않다”는 평가가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영화에서 유지태의 캐스팅은 탁월하다. 과거 작품들이 한명회를 탐욕스러운 악인으로만 묘사하며 외형적으로도 왜소하게 그렸다면, 유지태는 장신의 체격과 위압감으로 권력 그 자체의 얼굴을 구현해냈다.
유지태는 다른 인터뷰에서 이 역할을 위해 일부러 체중을 늘리고, 눈매를 위로 올리는 테이프까지 사용했다고 밝혔다. 그 섬세한 준비는 영화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의 탐욕과 권력 앞에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단종의 모습을 완벽히 재현해내며 그 비극적 대비를 더욱 극대화했다.
흥행을 넘어, 기억에 남는 이유
역사는 승자들에 의해 기록된다는 말이 있다. 그 과정에서 패자이자 피해자였던 인물들은 기록의 거친 붓질 아래 지워지고, 단순화된다. 단종 역시 국사 속에서는 종종 ‘힘 없고 나약한 왕’으로만 기억돼 왔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잊혀진 역사 속 인물들 사이에도 분명히 존재했던 가슴 뜨거운 관계와 서사를 복원해낸다. 시간의 거리 속에서 식어버릴 수도 있었던 관심을, 다시 현재로 끌어오는 힘이다.
흥행의 큰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자칫 무거워질 수 있는 서사를 휴머니즘으로 풀어내는 유해진의 감칠맛 나는 코믹 연기, 잘생긴 외모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비극성을 배가시키는 박지훈의 단종, 그리고 독 안에 든 쥐처럼 어디로도 물러설 수 없는 권력의 얼굴을 구현한 유지태의 한명회까지. 세 인물의 연기는 영화의 긴장을 끝까지 붙든다.
여기에 역사 기록에 대한 실제 고증이 서사에 깊이를 더하며, 관객의 마음에 긴 잔상을 남기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