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항상 빨리 변한다.
어렸을 때 해외에 살았던 나는 2,3년에 한번씩 귀국하면 이전과는 달라진 서울에 전경에 항상 놀랐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기억 속 풍경에 새로운 건물이나 도로가 마치 불청객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서울의 발 빠른 재개발은 7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시로 인구가 급격히 몰리며 주택난이 심화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재개발이 추진됐다. 이어 1980년대 서울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도시 전반에 걸친 건설 사업이 가속화되며 빠른 변화는 이 도시의 미덕이 되었다.
‘헌집 줄게, 새 집 다오’라고 끈임없이 외치는 떡두꺼비집 같은 서울.
그렇게 서울은 옛스러운 것들을 허물고, 그 자리 위에 더 크고 더 현대적인 것들을 세웠다.
하지만 오래된 서울의 옛 정취를 아직 지키는 곳들이 있다. 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는 도시의 타입 캡슐 공간들.
대오서점

75년의 세월을 거쳐온 대오서점은 원래 헌 책을 사고 파는 헌책방이었다. 책을 유독 사랑하던 조대식 할아버지는 서촌에서 책방을 운영하던 중, 평생의 동반자가 된 권오남 할머니를 만났다. 두 사람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을 따 지은 ‘대오서점’이라는 이름에는, 그 시작부터 사랑과 온기가 담겨 있다.
당시에는 책값이 만만치 않았던 터라, 사람들은 자연스레 헌책방을 찾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헌책방의 인기가 점차 사그라들었고, 서점 운영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조대식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주변에서는 가게를 정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말도 많았다. 하지만 책방에 깃든 추억과 시간을 지키고 싶었던 권오남 할머니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게의 일부를 끝내 남겨두기로 했다. 그렇게 대오서점은 2026년까지도 옛날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고 있다.

이제 대오서점은 헌책방이 아닌 카페로 운영하고 있다. 가끔은 전시회, 공연을 주최하는 문화공간으로도 변모하였다.

방탄소년단의 RM이 방문한 이후에는 국제적으로도 인지도를 얻어 해외 팬들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방문하는 곳이 되었다. 또한, 아이유의 앨범 <꽃갈피>의 자켓 사진을 촬영한 곳으로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곳곳에는 세월 뿐 아니라 따뜻함이 묻어있다. 할머니와 손주의 필름 사진, 누군가의 취향이 담긴 책들로 빼곡한 책장, 뒷마당에 핀 해바라기까지 이 곳만의 따뜻함을 완성해준다.
대오서점이 그 자리에 지킨 것은 온기다.
황학동 만물시장

조금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황학동 만물시장은 한국전쟁 직후 형성돼, 1960년대부터 서울에서 가장 활발하고 광활한 장터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 전쟁 난민들이 청계천 일대에 모여 골동품과 잡동사니를 하나둘씩 내놓으며 시작된 곳이다. 그렇게 형성된 시장은 시간이 지나며 골동품부터 주방기기, 가전제품까지 없는 것이 없는 거대한 벼룩시장으로 성장했다.

고장 난 물건을 들고 가면 뚝딱 고쳐준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이곳은 손때 묻은 기술과 정이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그 모습 덕분에 황학동 만물시장은 ‘도깨비시장’이라는 다정한 별명으로도 불렸다.
그러나 2000년대 초, 청계천 개발 사업이 시작되며 방대했던 황학동 벼룩시장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현재는 동대문구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 벼룩시장, 그리고 이곳 황학동 만물시장으로 나뉘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규모는 예전보다 많이 작아졌지만, 이곳에 남아 있는 온기만큼은 여전하다. 나는 이곳에 LP판을 사러 오기도 하고, 필름 카메라나 아직도 뒤가 유난히 두툼한 브라운관 TV, 오래된 시계들을 구경하러 오곤 한다.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으면 잊고 살았던 많은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필자도 서울에 거의 평생 살았는데, 작년에 DDP 가는 길에 우연히 이 시장을 발견했다. 익숙한 도시 한복판에서 갑자기 펼쳐진 낯선 풍경은 마치 여행지에 도착한 듯한 기분을 안겼다. 그 이후로 친구들을 하나둘 데려와 이곳을 소개했고, 놀랍게도 모두가 “이런 곳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빠르게 변해온 서울 속에서, 황학동 만물시장은 여전히 시간을 천천히 쌓아 올리고 있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지나치기 쉬운, 그래서 더 ‘시크릿’한 장소로 남아 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