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가끔은 이 도시의 획일적인 미의 기준이 숨 막히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정형화된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쉽게 밀려나고 가지치기되는 서울의 매정함 앞에서, 애정만큼이나 서운함이 커진다.
이런 도시의 분위기에 가장 통쾌하게 맞서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드랙 퀸들이다.
드랙 퀸과 드랙 쇼가 아직 낯설다면, 이는 젠더의 특징과 사회적 이미지를 과장하고 재해석해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하나의 퍼포먼스 아트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태어난 성별과 다른 젠더를 표현하며, 화려한 메이크업과 의상, 가발을 통해 고정관념을 유쾌하게 뒤틀고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여장’이 아니라, 젠더·정체성·아름다움에 대한 사회의 기준을 과감하게 흔드는 예술적 행위에 가깝다.
뉴욕과 같은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드랙 쇼가 클럽 문화는 물론 대중문화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았다.〈루폴의 드랙 레이스〉 같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이 메인스트림에서 사랑받으며, 드랙은 하나의 장르이자 문화로 인정받는다.

반면 한국에서 드랙은 아직까지 ‘낯설고’, ‘비주류’라는 시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이라는 단단한 틀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이 도시에서 자신의 몸과 목소리, 과장과 유머를 무기로 무대에 오르는 이들의 용기 있는 퍼포먼스와 아트에 집중해보려 한다.
필자가 사랑하는 자유가 살아있는 서울의 공간들.
1.트랜스
개인적으로 이태원에서 가장 사랑하는 바 중 하나다.
목·금·토에만 문을 여는 이곳에서는 드랙 쇼가 새벽 1시와 새벽 3시, 서울이 가장 깊이 잠들고 밤의 감성이 깨어나는 시간에 시작된다.
바틀을 주문하면 테이블이 제공되는데, 쇼가 시작되기 전 드랙 퀸들이 자연스럽게 테이블을 오가며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이 친밀함이야말로 Trance를 특별하게 만드는 이유다.
1995년에 문을 연 Trance는 필자와 동갑인, 이태원에서 손꼽히는 전통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도 퀴어 문화와 젠더 규범을 둘러싼 시선이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데, 90년대 중반 이곳이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의 분위기는 감히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그럼에도 이 공간은 살아남았다.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 소리 높여 외치기보다는, 화장과 음악, 유머와 과장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온 사람들 덕분이다. 그들에게 이 무대는 거창한 ‘투쟁’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유흥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쇼를 지켜보는 관객에게만큼은, 서울이라는 도시가 잠시 덜 매정해지는 통쾌한 순간을 선물한다.
📍TRANCE,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12길 7 B1 (네이버 지도)
2. Showboo Hipjiro
을지로에 있는 유일한 힙합 라운지.
게이 바는 아니지만, 매주 목·금·토 드랙 쇼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드랙 문화와 대중 사이의 거리를 자연스럽게 좁혀온 공간이다.
이곳의 드랙 퀸들은 단순히 무대에 오르는 존재가 아니다. 흥을 돋구고, 공간 전체의 온도를 한 껏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 사실 클럽이나 힙합 라운지에 가다 보면 종종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음악에 몸을 맡기기보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해 고개만 까딱거리거나, ‘잘 놀고 있는 척’을 해야 하는 순간들 말이다. 해방감을 기대하고 찾은 클럽이 오히려 사람을 조여오는 공간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답답함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Showboo Hipjiro의 드랙 퀸들이다.
누가 보든 말든, 먼저 과감하게 몸을 던지고 즐기는 모습을 통해 “이렇게 놀아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다. 남의 눈치를 내려놓고 음악을 즐길 수 있도록, 가장 멋진 방식으로 솔선수범하는 존재들이다.
📍쇼부, 서울 중구 수표로 48-14 1층 (네이버 지도)
3. Rabbit Hole
여기는 정말 마음껏 놀아도 되는 공간이다. 아케이드 펍으로 꾸며진 이곳에서는 술 한 잔을 손에 들고, 추억의 아케이드 게임을 자유롭게 즐길 수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라오케 나이트, 카바레 나이트 등 밤을 채울 이벤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목요일에는 게임과 가라오케로 분위기를 풀고,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드랙 쇼가 펼쳐진다. 일요일은 오픈 스테이지의 날. 이 밤만큼은 관객과 무대의 경계가 완전히 사라져 누구든 무대 위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가수처럼 노래를 잘 부를 필요도, 누군가의 기준에 맞게 예쁠 필요도, 전문가처럼 완벽한 무대를 보여줄 필요도 없다. 목요일에는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질러도 되고, 일요일에는 용기 있는 사람, 혹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대에 설 수 있다.
완벽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 순간, 비로소 재미가 시작된다.
래빗홀은 해방촌이라는 동네 이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해방’을 허락하는 공간이다.
📍레빗홀, 서울 용산구 신흥로 37 지하1층 (네이버 지도)
4. 2에프
코미디언 랄랄의 〈그러세요, 그럼〉 시리즈에 출연하며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은 드랙 퀸 보리가 운영하는 펍이다. 유머와 캐릭터로 먼저 알려졌지만, 보리는 단순한 캐릭터를 넘어선 숨은 실력자다. 메이크업 리얼리티 쇼 〈저스트 메이크업〉에 출연해, 드랙 퀸 메이크업이 단순히 ‘과장된 화장’이 아니라 기술과 예술이 결합된 표현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줬다.

이곳의 드랙 쇼는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만 열린다.
공연은 밤 11시와 새벽 1시, 하루 두 차례 진행되며, 완성도 높은 퍼포먼스로 꽉 찬 시간을 선사한다. 날카로운 유머와 통쾌한 에너지가 넘치는 무대는 물론, 가끔은 댄스 크루를 초청해 또 다른 장르의 퍼포먼스도 함께 즐길 수 있다.
후기를 보면 이 공간의 분위기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다. 관객을 무대 위로 초대해 날개를 달아주고 함께 무대를 즐기는 순간들도 엿볼 수 있다. 그저 모두가 함께하는 즐거운 순간들이 가득한 곳이다.
📍2에프, 서울 용산구 보광로59길 10 (네이버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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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랙 쇼 문화는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 수 있다. 깊게 자리 잡은 젠더 규범과 편견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는 시선 속에서, 이런 공연에 불편함을 느끼는 반응을 마주치기도 한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을 품는다. 드랙 쇼는 바로 그 욕망을 가장 솔직하고 과감한 방식으로 드러낸 하나의 표현일 뿐이다.
만약 드랙 쇼가 궁금하다면, 한 번 경험해보길 추천한다. 생각보다 훨씬 유쾌하고, 인간적인 밤이 될지도 모른다.
드랙 쇼에 가기 전, 이것만은 기억하자.
✔️가지고 있던 젠더 규범과 미의 기준에 대한 편견은 모두 내려놓고 갈 것.
✔️많은 공간이 입장료를 현금으로 받으니, 현금을 미리 준비할 것.
✔️바틀로 주문하면 테이블을 제공하는 곳이 많아, 공연을 여유롭게 즐기고 싶다면 바틀 주문을 추천한다.
✔️소액 지폐를 준비해 공연 중 드랙 퀸에게 팁을 건네는 것도 하나의 즐기는 방법이다. 즉흥적으로 퍼포먼스가 달라지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드랙 퀸들의 노력과 예술성을 존중하며 무대를 온전히 즐기는 태도다.
틀을 깨는 무대는 언제나 약간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를 내는 순간, 서울의 밤은 지금보다 훨씬 다채롭게 보일 것이다.